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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일상

세상을 향해 다리를 드러내다.

세상을 향해 다리를 드러내다.

세상을 향해 다리를 드러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의 다리는 무조건 감추고 있어야만 하는 성적 대상이었습니다. 17, 18세기 상류층 사회에서는 다리에 대한 편견 때문에 피아노 다리에까지 스커트를 입고, 닭고기 요리를 할 때조차 닭다리를 식탁 위에 내놓는 것이 커다란 실례가 되기도 했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여성들은 다리에 대해 조금씩 자유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스포츠 바람이 불면서 많은 여성들이 활동하기 편한 발목길이의 스커트를 스포츠웨어로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는 여성들의 발목에 대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많은 논란 끝에

결국 여성들은 발목 길이의 부츠로 발목을 가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59년 6월 영국 런던에서 한 패션쇼가 열렸습니다. 스물다섯 햇병아리 디자이너 마리퀀트가 경영하는 부티크 바자' 가 2호점을 열면서 그것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습니다. 빠른 템포의 음악에 맞춰 모델들이 차례차례 걸어나오자 사람들은 경악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델의 종아리가 다 드러났기 때문이죠. 치마 길이는 겨우 무릎을 가릴 정도로 짧은 미니스커트였습니다. 게다가 모델은 롱부츠에 검정 가죽 코트를 입고 있었다. 패션쇼에 참석한 사람들은 눈을 가리기도 했고 심한 욕설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최초의 미니스커트가 등장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미니스커트를 개발한 디자이너 마리퀀트는 대학 졸업 후 모자가게에서 일하며 옷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가게를 둘러봐도 자신이 원하는 디자인의 옷을 찾을 수 없었기에 그녀는 늘 불만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불만들은 직접 옷가게를 열게 만들었습니다. 바자' 라는 이름의 부티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첼시룩'을 성공시키면서 런던 유행의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마리는 이후 “재봉틀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갑니다"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세계의 유행을 주도하는 최고의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범 김구의 어머니

백범김구의 어머니

일흔여덟 고령이 된 백범의 어머니는 피난지 가흥에서 꿈에도 그리던 아들을 만났습니다. 9년 만에 처음 마주하는 얼굴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향해 뜻밖의 말을 건넸다. "나는 인제부터 너라고 아니하고 자네라고 하겠네. 또 말로 책하더라도 초달로 자네를 때리지는 않겠네. 들으니 자네가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한다니,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그 백범의 체면을 보아주자는 것일세.”


상해 시대까지만 해도 백범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바지를 걷어올리게 하고 매질을 했는데, 이제 백범의 위치를 생각해 매질을 그치기로 한 것입니다. 백범이 남경에 피신해 있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에는 신변이 위험해 어머니는 따로 집을 얻어 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백범의 어머니는 그런 위험 속에서도 남의 눈을 피해 장사를 하면서 열정적으로 아들의 독립운동을 도왔습니다. 마침 어머니의 생신이 되어 청년단과 노년 동지들이 축하연을 베풀려고 돈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눈치챈 어머니는 그들에게 그 돈을 그냥 달라, 그러면 당신이 먹고 싶은 음식들을 기꺼이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할 수 없이 그 돈을 내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그 돈으로 음식 대신 권총 두 자루를 사다가 그것을 독립운동에 쓰라면서 내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중일전쟁이 터져 남경에도 일본군의 폭격이 잦았습니다. 어느 날 밤 심한 폭격으로 백범이 거처하던 집도 무너졌는데,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나와보니 각처에 불이 붙어 밤하늘은 불바다였습니다. 날 밝기를 기다려 무너진 집과 시체들 사이를 헤치고 어머니 집을 찾아간 백범이 얼마나 놀라셨느냐고 말하자 어머니는 “놀라기는 무얼 놀라. 침대가 들썩들썩하더군" 하며 웃으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당당하던 어머니도 노쇠한 몸 속을 파고드는 풍토병은 끝내 이기지 못했습니다. 여든 두 살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백범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으니, 내 원통한 생각을 어찌하면 좋으냐!"